독립문 
 
독립문(사적 제32호)은 조선 말기 갑오개혁(1894~1896)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세운 19세기 말의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독립’이란 이름 때문에 언뜻 보면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지어진 문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반일(反日)의 상징이 아니라 반청(反淸)의 상징물이다.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된 자주국임을 천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의 주도 아래 고종의 동의를 얻어 진행했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뜻 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독립문은 그 취지대로 원래 있던 자리에 서 있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세워졌다.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영은문은 ‘은혜로운 이들을 맞이하는 문’이란 뜻의 문이다. 여기서 은혜로운 이들이란 중국 사신(당시엔 청나라)을 말한다. 이처럼 영은문은 수백 년에 걸친 조선과 중국의 종속 관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독립문 바로 앞에는 영은문 기둥을 받치던 밑돌인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아직도 있다.

조선이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의 상징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을 수 있었던 건 당시 강화도로 쳐들어와 강제로 조약을 맺은 일본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시대적 상황과 이어진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이 국제법상 확정이 되자 독립문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6년부터 시작한 공사는 1897년 11월에 완공됐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 후 청나라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 제 1 조에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라고 명시한다.

사실상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국 지위를 무력화하고 아무런 간섭 없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독립문은 ‘독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일제 강점기하에서 무사히 존속했던 것이다. 독립문은 사대의 상징을 허물고 지은 또 다른 식민지배의 상징이 돼버리게 되었다.

독립문은 중앙에 아치형의 홍예문이 있고, 홍예문의 중앙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이화(李花, 오얏꽃) 무늬가 방패 모양 문양판에 새겨져 있다. 이맛돌 상단 앞뒤에는 가로쓰기로 ‘독립문’과 ‘獨立門’이라 각각 쓰여 있고, 양 옆에 태극기를 조각한 현판석을 달아놓았다.

1924년 7월 15일 동아일보의 ‘내 동리 명물’ 이라는 연재기사에 나오는 내용에 따르면 독립문의 현판 글씨는 당시 명필로 유명했던 조선 귀족 후작 가카오시가 쓴 것이라 나온다. 그는 바로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고 부귀영화를 누린 매국노 이완용이다. 그가 독립문의 현판글씨를 쓸 수 있었던 건, 독립신문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독립협회 주요인사로서 개화기의 독립협회를 이끌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완용은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에 모인 수천 명의 동포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까지 했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치려고 한다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처럼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영원의 건축 -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