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더함의 공간 
 

건물의 축선을 전위시키거나 공간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공간구성 수법은 산지에 지어지는 사찰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서원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병산서원은 일시에 조영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증축되거나 개축되었기 때문에 그간 축적된 건축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환경을 충분히 배려하면서 당시의 지형 조건에 따라 공간을 융통성 있게 구성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지녔던 자연친화 개념이 철저한 규범을 중요시하는 다른 어떤 개념보다 앞서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373쪽 병산서원)

민영사찰의 경우에는 재정상의 이유로 건물을 일시에 짓지 못하고, 그때그때 지형에 어울리게 단계적으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축 자체만을 따져 통일성이 결여되고 산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형을 잘 활용하여 건축공간을 구성하면 자연지형의 큰 흐름과 맥에 따라 질서 있고 통일성 있게 배치할 수 있다.(…)산지사찰 건축을 보고 산만하다거나 무질서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주변의 자연지형을 배제하고 보는 데서 비롯된 편견에 불과하며, 이렇게 건축공간을 주변의 자연지형과 결부하지 않고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무의미하다. 산지사찰 중, 지형지세를 잘 활용하여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된 건축공간을 이룬 가장 좋은 예가 바로 화엄사이다. (78쪽 화엄사)

여기에 현재 미륵전의 위치가 주불전의 위치로 적절하지 않아 보이는 결정적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산세와의 연관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점이다. 전통 불사건축에서는 주불전의 남향 배치를 선호하는 것이 관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우선한 것은 배산과 전방 조망이었다. (216쪽 범어사)

현대건축에서도 복도와 같은 통로공간이 여러 공간을 이어주는 단순한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기능까지 가지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모셰 샤프디가 설계한 캐나다 국립미술관,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퐁피두센터 등이 좋은 예이다.(…)봉정사 건축에서 주요 공간의 마당을 이어주는 복도 같은 공간이 자연경관까지 연결하는 매개공간이 된다는 점은 건축적으로도 훌륭한 구성 수법을 사용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물론 봉정사에서도 이러한 개념이 초창기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새로 확장되는 건축공간을 기존의 건축공간과 유기적으로 구성하려는 건축가의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39쪽 봉정사)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해볼 때, 경복궁이 상징성이나 기념성을 중시한 궁궐건축이라면, 창덕궁은 일상성을 중요시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기념성과 일상성이라는 두 가지 지표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건축을 설계할 때마다 자주 거론되는 과제였다. 두 지표 모두 중요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들은 상호배반적 성향을 띠고 있어서, 자칫 기념성이 강조되면 일상성이 소홀해지고 일상성을 중요시하면 기념성이 저하되기 쉽다. 창덕궁은 일상성을 중요시하면서도 궁궐로서의 위엄과 격조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300쪽 창덕궁)

[책제목] 흐름과 더함의 공간  - 안영배의 한국건축 읽기
[지은이] 안영배
[출판사] 다른세상

[차례]
책을 열며 006
영축산의 산세와 밀접하게 연관된 성역공간 통도사 012
ㄱ자형 층단 위에 펼쳐지는 장쾌한 건축경관 화엄사 050
중첩되는 층단 구성으로 극락정토를 표방한 부석사 092
가야산을 향해 달려가는 행주형국의 공간 해인사 126
석탑과 대석단으로 건축의 조형성을 높인 불국사 162
진입과정의 공간 구성이 탁월한 범어사 194
중루에 의해 공간이 활기를 띄게 된 봉정사 218
퇴계의 환경친화적 건축관이 잘 반영된 도산서원 250
기념성보다 일상을 중시한 환경친화 건축 창덕궁 284
분지형의 자연지형을 잘 활용한 창덕궁 부용지 정원 306
확장을 거듭하면서 완결된 건축공간 종묘 328
건축공간과 자연풍광의 상생적 조화 병산서원 356
글을 마치고 375
주석 보기 378
참고 문헌 382

[소개의 글]
전통건축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건축가에게 매우 중요하다.자국 건축문화의 세계적 입지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뿐더러 작품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전국의 전통 건축들을 직접 답사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흐름과 더함의 공간’(다른 세상 펴냄)의 개정판을 내게 됐다.30년 만이다.

흔히 건축물 개개의 조형이나 연대기적 가치로만 건축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한국 전통건축의 특색은 주변의 지형지세와 유기적으로 융합하는 공간 구성에 있다.공간의 구성은 무생물인 건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건물들 간의 배치를 달리해 멀리 숲이나 하늘까지 시선을 흐르게 하고,공간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좁고 휜 진입로를 지나 넓고 정연한 공간에 들어서도록 치밀하다.

이 책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건축가들 사이에서 파르테논 신전에 비견되는 종묘나 무질서해 보이는 가람 배치가 전체적으로 불국을 향하는 한 척의 배 형상을 띠는 해인사,원심성과 구심성을 융화시킨 부용정 등 세계적으로 재조명할 가치가 있는 명건축들을 다루었다.이 건축물들은 자체도 중요하지만,그 안에 담긴 건축정신도 강조하고 싶다.건물을 제한된 공간에서 증·개축할 때 기존 건축 공간의 질서를 흩뜨리지 않고 주변의 자연 지형지물을 해치지 않으면서 특색 있는 건축공간을 만들고자 했다.이런 자연친화 개념은 현대의 건축단지나 도시 설계에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한 예로 창덕궁 인정전의 서쪽은 현재 회랑 없이 낮은 담장과 높은 수목으로 트여 있다.일제강점기에는 정형을 추구하는 일본 건축양식에 따라 네 모서리 모두 회랑을 둘렀던 곳이다.최근 원래대로 복원했다.만약 인정전 주변이 꽉 짜인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더라면 어땠을까.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혀 답답하고,주변의 수목과도 어우러지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건축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요즘 들어 마구잡이로 주변 환경을 훼손하면서 ‘르네상스’라는 허울 좋은 말을 갖다 붙이는 이율배반적 도시개발을 많이 목격한다.또한 최근 도로 건설에 맞춰 전통건물의 진입로 위치를 바꾸거나 사찰 앞에 커다란 박물관을 유행처럼 세우는데,이처럼 최적의 동선과 조망을 무너뜨리는 어리석은 일도 적지 않다.안타까운 일이다.

일반 독자들도 이 책을 통해 전통건축을 대하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예컨대 앞으로 불국사에 가서 다보탑,석가탑,석굴암만 휙 둘러보고 나오지 않기를.옛 진입로인 서쪽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보라.그곳에서 사선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실감해 보라.사람의 눈과 발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끝없이 고심하고 치밀하게 설계한 선배 건축가들의 지혜는 아는 만큼 볼 수 있고,아는 만큼 느낄 수 있다.사진과 설계도,건물배치도를 풍부하게 넣어 읽으면서 상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Body Metaphor - Ubiquitous technology and environment
현장상황이 좋아질수록 야기되는 균열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